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25 전쟁 (문단 편집) ==== [[대한민국]] ==== >6.25 전쟁 당시 호남 지역의 학살 피해자는 8만 4,003명으로, 대한민국 전체 학살 피해자 12만 8,936명의 65%에 이른다. 이는 극심한 좌우대립의 결과로서, 이 지역에 내재해있던 지주-소작농 갈등 구조가 자리잡고 있다. >---- >「대한민국 통계연감(1953년)」 내무부 통계국. 한국 정부와 한국군이 저지른 학살은 [[보도연맹 학살 사건]]([[경산 코발트광산 학살 사건]] 등), [[국군의 형무소 재소자 학살|형무소 재소자 학살]]([[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등), 부역 혐의 학살([[고양 금정굴 학살 사건]] 등)등의 범주로 나뉜다. 보도연맹 학살 사건의 경우 대한민국 국군 및 [[서북청년회|서북청년단]]과 같은 극우 단체에 의해 10만~30만 명의 [[삼팔선]] 이남 거주 '''대한민국 국민'''이 학살당한 사건이다. 한편 [[거창 양민 학살사건]]의 경우 민주화 이전 독재 정권 시절부터 암암리에 인지도가 있던 유일한 학살 사건이며, 이를 제외한 다른 학살 사건의 존재는 [[4.19 혁명]] 이후 [[5.16 군사정변]] 이전 피학살자유족회가 활동하던 단 1년의 기간을 제외하면 민주화 이전까지는 철저히 금기시되었다. 아울러 학살 외의 전쟁범죄로는 [[한강 인도교 폭파]], [[소년병]] 징집, [[국민방위군 사건]] 등이 있다. 학살을 저지르는 한국군 및 한국 경찰을 유엔군이 저지하여 목숨을 건진 케이스는 있다. 영국군이 [[서울 홍제리 집단총살 사건]] 당시 추가적인 학살을 막은 사례 등. 그 외에도 각지에서 민간인 차원의 좌우 갈등이 극에 달하여 학살이 빈번했다. 전라도는 좌우대립이 극심했고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사실 양반들이 6.25 전쟁으로 망했다는 옛날의 믿음[* 다만 북한은 전통적인 '양반'이 드문 지역이었다. 대신 현대 한국과 비슷하게 경제적인 격차만 있었는데 이들이 숙청의 표적에 포함된다. 이런 숙청을 피해 한국에 온 사람들이 세운 기업이나 학교 등이 현재도 남아 있다. [[함석헌]]이나 [[황순원]] 같이 북한의 이러한 숙청을 목격한 경우 북한에서는 머슴 같은 사람들의 권력욕을 부추겨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처리하였음을 주장하였고, 심지어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신의주 반공학생사건]]이라고 하여 탱크와 항공기가 시위 진압에 동원되기도 했다. 함석헌은 "김일성의 무리가 계급 갈등이 적은 이북에 '어거지 혁명'을 일으켰다"며 분개했다. 《[[카인의 후예]]》라는 작품에서도 개판이 된 북한의 모습이 등장한다. 여기서 트라우마에 시달린 사람들이 [[제주 4.3 사건]]에 가담하는 등 북한의 정국은 대단히 혼란스러웠으며, 이는 북한에서도 정당한(?) 계급투쟁으로써 인정하고 있다.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세계적으로도 상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고위층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제거할 수 없었다.]과 달리 전라도 양반들조차 물론 피해를 크게 입은 사람들도 있으나 오히려 자신들을 적대하는 사람들에게 만만치 않은 피해를 입히고도 멀쩡한 사람들도 있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혐오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그에 대비한 만만치 않은 상대였기 때문에 공격자나 범죄자 혹은 무고한 사람들[* 서로 말이 다르긴 하다.]에 대해 거의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졌다. 지난 세기에는 독재 정권이라서 진상 조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는 이유와 [[반공]]이 국시였던 점으로 인해 '''북한의 사악함과 국군의 영웅적 희생'''을 강조하기 위해 냉전이 끝날 때까지 은폐되었지만, 민주화 이후 이러한 부분이 재조명되고 일부는 국가의 공식적 사과 및 보상이 이뤄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